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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장의 시대

이슬아 글.
말은 우리를 ‘마치 ~인 듯’ 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9
“큰일은 복근으로 하는 거다. 배 나오면 끝장이다.” 12
“글이 잘 안 써지면 잠깐 집밖에 나가서 산책을 해. 바람도 좀 쐬고…. 나무도 좀 보고… 손으로 풀도 좀 만져보고 ~그렇게 차분히 시간을 보내다 다시 책상 앞에 돌아오면 딱 이런 생각이 들 거야.
~”씨바, 그냥 아까 쓸걸.”
~슬아는 분노한다. “씨바….” 19
“모부들아, 난 다 썼다.” ~글을 다 쓴 뒤엔 유능감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마감을 마친 작가에게는 아드레날린이 돈다. 출판게에서는 그것을 마드레날린이라고 한다. 21
가부장제 속에서 며느리의 살림노동은 결코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슬아는 복희의 살림노동에 월급을 산정한 최초의 가장이다. 살림을 직접 해본 가장만이 그렇게 돈을 쓴다. 살림만으로 어떻게 하루가 다 가버리는지, 그 시간을 아껴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 지 알기 때문에 그는 정식으로 복희를 고용할 수 밖에 없다. 40
인간은 세대가 거듭될수록 휼륭해지는지도 모르겠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아이폰도 갈수록 좋아지잖아.” 가녀장이 말했고 복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에게는 좋은 것만을 반복하려는 의지가 있다. 반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반복하지 않을 힘도 있다. 41
“세 보이려는 타투는 오히려 더 약해 보여요. 아름다운 아저씨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아빠 같은 중년 남자일수록 겸손한 귀여움을 추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에요.” 46
존자의 집, 존자의 텃밭, 존자가 그릇을 정리하는 방식이 슬아의 시선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신을 꼼꼼하게 바라본 문장을 듣다가 존자의 얼굴이 기쁨으로 달아오른다. 104
“다 썼다, 쒸발!” 129
복희는 그 모든 게 뭐하는 짓인지 영 모르겠고 그저 예술하는 아가씨들의 허기만이 신경쓰일 뿐이다. 146
말수가 적은 게 아니라 눈물을 참는 것이었던 다운을 생각하다가 슬아의 마음이 아파진다. 147
슬아가 다시 나타나 옷을 걸어둔다. 그리고 욕조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목욕하는 미란이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 건 슬아의 오랜 습관이다. ~”너는 너랑 질 지내?” 슬아는 대답한다. “상사처럼 대해.” 156
슬아가 몇 달간 집필하고 편집하고 디자인한 디지털 파일이 이날 처음으로 물성을 얻게 된다. 158
세상과 절묘하게 불화하는 주인공들이 슬아의 소설 속에 산다. 160
공식적으로 띨띨이가 된 슬아가 회한 속에서 스티커를 붙이며 변명한다. “같은 책을 계속해서 편집하다보면 뭐가 뭔지 모르게 돼… 눈이 낡아서…” 169
이제 슬아는 책이 양면테이프보다 열 배는 두려운 무엇임을 안다. 그 두려움을 알게 된 것에 안도한다. 책을 사랑하는 동시에 두려워하는 자들이 출판사를 운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173
그런 식으로 서로가 이유인 동그라미 한 개가 만들어진다. 181
슬아의 글쓰기에도 분명 최초의 ‘너 땜에’가 있었다. 유치원 숙제 때문이었던가. ~이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다. 삼십 년간 너무나 많은 이유들이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 문학의 이유는 그 모든 타자들의 총합이다. 181
슬아는 이와에게 말한다. ”네가 너무 아름다운 걸 써서 그래.” ~글쓰기의 세계가 얼마난 영롱한지를, 오랫동안 그 곁에서 고구마 마탕이나 해주고 싶다고 복희는 생각한다. 191
한 번 잘 써 놓은 이야기는 하루이틀이 지나도 날파리가 끼지 않았다. 몇백년이 흘러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듯한 작품들이 슬아의 서재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복희의 세계에서 그런 일은 결코 당연한 얘기가 아니다. 227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228
그러는 사이 복희는 집중해서 책을 마저 읽는다. 소설은 복희의 눈코입을 통과하며 거의 정확하게 이해받고 있다. 바로 이 사람을 독자로 만나기 위해 몇 백년을 살아남았다는 듯이, 소설은 복희의 손 아래에서 영광을 누린다. 234
슬아는 자신의 유두가 컨폄 대상이라는 것이 웃겨서…241
국민 정서는 누가 정하는가? 슬아도 국민인데 남의 찌찌에 관심이 없다. 242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선생님이 될 수 있다고요.” 263
그것은 딸이 쓰는 역사에 가담하는 일이다. 279
가족의 우산 중 좋은 것만을 물려받을 수 있을까.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그들로부터 멀리 갈 수 있을까. 혹은 가까이 머물면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로에게 정중한 타인인 채로 말이다. 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