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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쓰는 법

이현
예술의 그 어떤 장르도 수용자를 중심으로 장르를 규정하지 않는다. 음악에도 미술에도 영화에도 어린이를 이를 위한 작품이 있지만, 별도의 장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학에만 유독 ‘어린이’가 붙은 장르가 따로 있는 것이다. 25
동화는 어린이를 위한, 그러니까 ‘수신’의 장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다.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다. 26
우리 차가 왜 이렇게 망가졌는지 묻는 여섯 살 딸내미, 내쪽 보험 회사 직원, 상대 쪽 보험 회사 직원, 상대 차주, 사고로 인한 지각을 변명해야 할 나의 직장 상사, 까칠한 주차장 관리인, 요즘 어쩐지 자꾸 신경 쓰이는 그 남자….. 당연히 이야기의 초점이 초점이 달라진다. 초점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도 달라진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끔, 나에게 공감할 수 있게끔, 그에 따라 이야기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30
그러므로 창장의 과정에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책이 나왔을 때 읽게 될 실제독자가 아닌 내포독자, 즉 작가가 임의로 설정한 독자다. 31
보미의 욕망은 시대의 주류 질서와 충돌한다. 보미는 문제적 개인이다. 42
전형성은 인물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개성은 인물의 매력을 높인다. 걸림돌은 어떤 세력일 수도, 어떤 사람일 수도, 어떤 상황일 수도, 자신의 성격이나 마음일 수도 있다. 43
인물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트리지 말라. 문제투성이로 만들지 말라.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단 하나의 문제, 인물의 욕망을 가로막는 단 하나의 걸림돌이면 된다…..동정은 끝끝내 동정일 따름이다. 내 이야기의 주인공을 한낱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기 바란다. 47
마라가 온전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움직였으면 했다. 그것이 공동의 선과 일치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마라 개인의 욕망이 우선이었다. 나는 마라의 욕망을 발견해야 했다. 그러자면 마라의 결핍을 먼저 이해해야 했다.
물러난다면 욕망이 아니다. 주인공이 아니다. 48
장애아동은 비장애아동의 각성과 성장을 위한 도구로 보인다.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52
상황을 어린이문학 동네로 바꾸어 가정하면 이런 얘기가 된다. 아무도 모르는 무명의 습작생이 피를 통하며 글을 쓰다가(반대합니다) 천 일 동안 밤마다 북한산 계곡에서 목욕재계하고(불법입니다) 정상에 올라 천지신명께 기도하여(응원합니다) 마침내 걸작을 써내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서, 세상이 나머지 우리를 보고 혀를 찬다면? 쯧쯧. 노력이 부족해. 남들이 피를 토하면 너는 심장을 토해야지. 네? 심장을 토하면 사망인데요? 그러면서도 우리는 속으로 고개를 떨구게 될 것이다. 난 왜 이것밖에 안 되지…..53
약자를 마냥 순진한 존재로, 달리 말하면 아무 욕망 없는 존재로 그려서는 안 된다. 그건 약자를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56
아이는 부모에게 맞서는 게 자연스럽고 옳고 건강하다. 동화는 그런 아이의 내면을 살피고 발견하고 드러내고, 나아가 응원해야 한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라고 박수를 쳐야 한다. 그것이 어른의 일이요, 동화의 일이다. 65
당신은 누구의 이야기를 하려는가? 그 인물은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에 좌절하는가? 그러한 갈등을 밖으로 터트리는 폭탄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그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계획인가? 77
사람마다 문장력은 천차만별이다. 누구도 최고의 문장을 쓸 수 있다고 자신할 순 없다. 하지만 최선을 쓸 수는 있다. 그렇게 다짐하고 노력할 순 있다. 자신이 쓸 수 있는 최고의 문장, 그건 확신으로부터 나온다. 자신감에서 나온다.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 나는 이렇게 믿는다는 확신. 100
배를 띄ㄴ우는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정말로 배를 띄워야 한다. 안톤 체호프 선생 가로되, “도입부에 총이 등장했다면 반드시 총을 쏘라.” 113
여덞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면 어떨까? 얼니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충격과 공포를 안길 수 있다. 혹은 어린 나의 충격적인 언사에 지금의 내가 총 맞은 것처럼 가슴앓이할 수도 있겠다. 123
어린이를 독자로서 진지하게, 정직하게 대해야 한다. 더 잘될 거라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3할도 못되는 타율에 허덕이며 실수와 실패와 상처를 반복함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의 좌젖ㄹ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설 수 이는 나에 대해, 너에 대해,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일이다. 130
어쩄거나 이미 그런 책이 있는데 굳이 또 비슷한 책이 있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나무야, 나무야, 우리가 미안해. 143
궁금하지도 않은 정보를 쏟아 내는 건 설레발밖에 안 된다. 다른 용어로는 주책바가지.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몸이 달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아쉬울 게 뭐가 있는가(그런 척 하자). 작가는 정말로 재미난 이야기를 다 알고 있지만, 독자님 하는 거 봐서 조금씩 들려주겠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149
거대한 빙산을 창조하되, 그 가장 아름답고 날카로운 일각만 내보여야 한다. 152
동화를 쓰고 싶다, 아니 써야겠다!고 생각한지 1년이 된 것 같다. 나는 어쩌다가 동화를 써야겠다고 다짐했을까. 생각해보면 지금 내 일상을 지배하고, 내가 더 하지 못해 애 달아 하는 것들은 대부분 하나의 큰 계기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저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쪽에 가깝다. 이유는 뾰족하지 않더라도 어린이를 쫒다보니 이래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그걸 조명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나름 동화를 공부해본다고 끄적여도 보고, 책도 읽어보고, 좋다는 동화도 읽어보고 있는 데 갈피 잡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우연히 발견한 이 책. 책 이름이 무려 ‘동화 쓰는 법’이라니…. 정말 허겁지겁 책을 결제해 펼쳤다. 누군가에게는 원론적인 이야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동화의 ㄷ자도 모르는 나에게는 첫 걸음을 딛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특히 마음에 닿았던 문장은 맨 마지막에 기록한 ‘거대한 빙산을 창조하되, 그 가장 아름답고 날카로운 일각만 내보여야 한다.’였다. 동화에 비춰지지 않는 부분까지 작가의 머리속에, 노트에는 있어야 하는구나.
세상에는 여러 아이들이 있고, 세상 누구나 아이였던 적이 있다. 오늘부터는 그 많은 아이들을 하나씩 마음 속으로 부르면서 글을 적어봐야겠다. 언젠가는 그거 내 이야기라고, 내 글과 부름에 답해주는 아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또 모르지. 수많은 책 속에 묻히더라도, 누군가는 내가 쓴 어린이의 삶을 읽고 힘을 얻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