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지 저. 2024, 비룡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말라, 삶이 그대를 속인다면 분노하라, 투쟁하라!” 라는 구절을 가져와 슬쩍 넣었다. 이유없이 막막하고, 이유 없이 거칠고, 이유 없이 발랄하던 나. 조각조각 흩어지는 내 모습을 그리기에 이 뒤죽박죽 형식의 책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나의 첫 책과 내용은 사뭇 다르나, ‘우스꽝스러운 전체를 만드는 것’이라는 책의 목표는 같았다. 14
→ 최근에 독립심화학습의 일환으로 <조경의 부피>를 준비하고 있는데,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리저리 넘기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미지를 조합할 수 있도록 제본한 이 책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결국 <조경의 부피>를 통해 전하고 싶은 말도 조경이란 조경가에 손에서 탄생한 모든 행위를 말하며, 먼저 행해지고 있는 형태나 행위가 자신과 다른 조경가에게 발목을 잡는 다른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우리는 새롭고 자유로운 조경을 하고 싶었다. 조경가의 이름을 걸고 뻔뻔하게 요리와 예술과 영상을 하는 사람이고 싶었기에. 작가의 20대를 담아준 이 제본이 우리의 20대도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됐다.
매력적인 그림책들은 무거운 것을 가볍게 살짝 들어 올려 단순한 마음으로 전하는 힘이 있었다. 이탈리아 예술가 브루노 무나리(1907~1998)는 “아름다움이란 바로 정확성의 결과다, 정확한 설계는 아름다움을 낳는다.” 라고 했다. 목적과 결과가 명쾌한 작업, 내가 건네줄 이 예술의 대상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자기도 모르는 예술에 휘둘린 예술가보다는, 자기를 구성하고 포장하여 내놓을 줄 아는, 세상 이치에 바른 창작자가 더 좋아 보였다. 18
“너는 학생이야. 지금은 여러 가능성을 탐구해야 할 때야.”
“나는 학생이고 싶지 않아요, 탐구하고 싶지 않아요.
완성해서 출판하고 싶어요.”
”완성한다고 출판되는 건 아니야.”
“그래도 완성하고 싶어요.”
“출판되기 힘들꺼야.”
“그래도 해볼 거예욧.”
“……”
“……” 32
<나의 명원 화실> 이수지 저.
수지의 생일을 축하하며 선생님이 하늘과 새와 산과 논과, 가시덤불을 점으로 그려 보았단다.
선생님은 수지가 늘 수 많은 빛깔을 통해서 현명하고 지혜로운 소녀가 되기를 기원하며, 보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해 힘껏 띰박질하는 건강한 공주님이 되기를 마음 속에서 빈다.
수지야- 엄마 말씀 잘 듣고 학교 공부에 충실하며, 선생님하고는 하얀 백지 위에 은하수를 수 놓자.
안녕 59
좋은 공기와 좋은 풍경에서 좋은 이들과 술을 마시면 취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리더의 미덕과 부덕을 배웠고,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낭만과 의지만으로 프로젝트가 굴러가는 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정한 사람이 정말 화가 났을 때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술가들이란 참으로 비현실적이라는 것도 새삼 알게 되었다. 70
“그냥 수지 씨한테 보여 드리고 싶어요. 제목은 ‘낭중지추’ 흔히 ‘탁월한 사람은 눈에 띈다.’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저는 글자 그대로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주머니 낭은 여성의 자궁으로 여기고, 주머니 속에 송곳을 가진 종족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 눈엔 ‘재주’로 보이나 이 사람들에겐 ‘천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95
“에브리띵이즈언더컨추롤, 잘 다녀와.” 98
아이들의 이름은 ‘산’과 ‘바다’입니다. 친구가 그랬어요. 산과 바다를 낳고 키우다니 너 스케일 한번 크다고, 그렇지! 라고 우쭐거렸지만, ‘우주’와 ‘별’을 키우는 분도 계시다길래 다시 겸손해지기로 했습니다. 147
<어디갔어, 버나뎃 Where’d You Go, Bernadette(2019)>
“요점을 흐리지 마. 너 같은 사람은 창작을 해야 해. 그게 세상이 너를 여기 보낸 이유야. 네가 그걸 안 하면 넌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돼. 너의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단 하나야, 닥치고 가서 작업해 뭔가 만들라고!” 156
이기적인 나에게 가랑비 젖듯 익숙해지기를 바란다. 나의 무용함과 예술의 무용함을 깊숙이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그게 잘 안 되면, 적어도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자. 당신의 무용함은 당신에게 유용하며, 세상에도 유용하다.
내 친구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태껏 못 누린 무용함을 누리렴. 그래도 되냐고? 그럼 그럼. 그 무용함이 우리를 어디까지 데려가나 한 번 보자꾸나. 쓸모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157
종이책은 ‘만질 수 있는 형태의 생각’이다. 종이책의 촉감과 책을 넘기는 행위는 ‘책을 보고 있는 나’를 인식하게 한다. 책에는 처음과 끝이 있다. 경계가 느껴지지 않는 전자책과 달리 물리적인 종이책은 그 경계가 분명하다. 182
“불안정성, 불안정성!Instability, Instability!
엄청나게 떨리지?
너의 약한 부분을 느껴 봐.
새로운 곳이라서 그래.
새로운 곳에선 언제나 불안정함을 느끼지.
불안정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곳은 새로운 곳이 아니야!” 248
‘내가 고른 책’이라는 것만큼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물건도 없는 것 같아요. 책이라는 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고, 언제든지 내가 원할 깨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제 도서관에 가도 헤매지 않고 어느 쪽 책꽃이로 가야 할지 알 수 있게 되는 거죠. 책을 고를 줄 알게 된다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뭐고 싫어하는 게 뭔지 알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성장한 아이는 나중에 어른이돼서도 스스로 가장 행복하고 즐거울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길로 나아가게 되겠죠. 280
<영혼을 잃지 않는 일러스트레이터 되기> 중 이수지 인터뷰에서.
“제한과 조건이 없는 일은 없습니다. ‘자기 것’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발견되고,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위대하다고 하는 작업은 주어진 조건을 이용해 그 틀 자체를 바꾸거나 확장해 버린 것들이곤 하지요. 그 다음에는 그저 조율입니다.” 290
어린이 책에 대한 편견은 살아 있지 않고 정형화된 귀여운 이미지들에서 온다. 그 귀여운 것들은 아이를 귀엽게만 보고 싶은 어른들이 생산한 것이다. 수많은 어린이 책의 작가들은 꾸준히 이렇게 이야기 해 왔다. “너희들은 절대로 약하고 귀여운 것이 아니야. 어른들이 너희에게 주는 역할을 받아들이지 말기를 바란다. 너희는 삶으로 가득 찬 씩씩한 존재야!”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