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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저. 김영현 옮김.
그렇게 10분, 15분씩 들여서 한 작품을 보고 있으면 도중에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했고, 처음에 전혀 보이지 않았던 세세한 부분에 놀라기도 했다. 왠지 내 눈의 해상도가 올라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28
오히려 시각장애가 있는 분들과 함께 작품을 보면 미술관, 학예사, 그리고 눈이 보이는 감상자도 무언가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작품을 보는 방식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눈이 보이는 사람들도 모두 일치하지는 않아요. 그런 인시긔 엇갈림을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서로 대화하면서 보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120
미국의 인지심리학자이자 미학자인 애비게일 하우센(Abigail Housen)의 심미적 발달 단계 이론과 시각적 사고 전략(VTS) 감상 이론에 기초하여 MoMA가 개발한 감상법으로 작품을 면밀히 관찰하고 각자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하며 토론하는 감상법을 가리킨다. 일본과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의 교육 현장에서 대화형 미술 감상법을 활용한 수업이 이뤄지고 있다.
“이런 일이 가끔 있어, 다 함꼐 보다가 알게 모르게 작품의 핵심에 다가가는 거야, 혼자서 거기까지 다다르기는 어렵지만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실은 그럴지도’ 싶은 곳까지 가는 거야.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도, 다 같이 하면 가능해져, 그래서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작품을 보는 게 재밌는거야.” 201
“관음님의 이름은 ‘볼 관’와 ‘소리 음’이라는 한자를 쓰지요? 무언가 의미가 있는 건가요?
“그렇죠. 인도에서 불리는 이름을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옮긴 거라 한자 자체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음의 본래 의미는 ‘모든 방향을 보다’. 또는 ‘사람들을 두루두루 보다’.라는 것입니다. 관음님에 관해 쓰인 불경에는 ‘시선’에 관한 부분이 있는데, 자애로운 눈으로 살아 있는 온갖 것을 ‘두루두루’ 본다고 적혀 있답니다. 203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우리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러면서 항상 ‘악’으로 치부해왔던 귀신이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고 상상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함께 작품을 작품을 보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게 사람과 사람ㅇ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한 걸음씩 뛰어넘으면, 우리는 새로운 ‘시선’을 획득한다. 그 결과 세계를 ‘두루두루 보는’ 따뜻한 시선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05
일반적으로 장애인이 하는 예술은 ‘아르 브뤼트art brut’로 분류된다. 그 프랑스 단어를 직역하면 ‘날 것의 예술’로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 기존의 예술 교육과 활동 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정의된다. 영어로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와 같은 의미인데, 애초에 사람의 배경과 경력에 기초해 ‘아웃사이더’이니 ‘날 것’이나 부르는 것에서 오히려 미술계의 배타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12
시라토리 대단한데!
아리오 최고야. 엄청 흥미로워!
마이티 목에 건 팻말에는 ‘스마트폰으로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라고 적혀 있어.
시라토리 그럴듯하네, 하하하!
마이티 그리고 ‘목적지로 가는 법은 하나가 아냐!’라고 쓰인 것도 있어, 정말로 길을 가는 법을 뜻하기도 하겠지만, 삶을 살아가는 법을 뜻하기도 하겠네.
아리오 대단해. 심오하다!
223
다정과 배려도 지나쳐버리면 편견과 차별이 된다. 231
스윙의 모토 중에는 ‘아슬아슬한 탈선을 하자.’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업무 시작 시간은 제각각 다르고, 졸리면 낮잠 자기를 장려하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휴가를 쓰는 사람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모르는 사이에 우리 내면에 똬리를 튼 빡빡한 규범의 바깥으로 용기 내어 한 발 나가 자기 규제를 해제하면, 에전에는 탈선이었던 일들이 조금씩 허용 범위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보통’과 ‘정상’과 ‘당연’의 영역이, 다르게 표현해 ‘편안한 삶’의 폭이 넓어진다. 240
그 말은 너무나 가볍다.
‘사투’나 ‘드라마’ 같은 말로 포장해보리는 것. 사회 전체의 이읽을 명목으로 되풀이되는 희생을 용인하는 것. 죽음조차 미화하는 것. 단 하나뿐인 생명을 잃은 사람조차 ‘불굴의 드라마’로 힘없이 빨려 들어가고 만다. 283
앞서 적었듯이 시라토리 씨가 태어난 시대에는 일부 공기관이 ‘장애가 있는 아이는 불행하다’고 적극적으로 널리 알릴 정도였다. 그로부터 50년 정도 지난 오늘날 그런 공보 활동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료 기술이 눈에 띄게 진보하면서 이제는 유전자상 난치병과 장애가 몇 가지 범주로 분류되어 무엇을 얼마나 치료해야 할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그런 것이 우생 사상 아니냐고 묻는다면, 구할 생명과 구하지 않을 생명 사이에 어떤 방식으로든 선을 긋는 것이니 분명히 우생 사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급격한 변화가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단순하게 ‘우생 사상이라니 당치도 않다.’라고만 외치는 것이야말로 외려 사고를 멈추는 것일지도 모른다. 313
“그러면 실제로 얼굴을 맞대면서 다양한 정보를 얻겠네, 작품을 감상할 때도 대화하며 오가는 말은 정보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테고, 분위기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것에서 많은 걸 얻는거야? ”맞아, 상대방이 어디를 향해 이야기하는지,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나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런 게 중요해.” 323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착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때껏 나는 시라토리 씨가 말로 하는 대화에서 많은 정보를 얻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작품 감상도 말만 들을 수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는 있어도 ‘대부분의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 이건 무척 큰 차이다. 324
목욕을 마치고 나온 시라토리 씨는 딱 달라붙는 하얀 타이츠를 입은 채 부엌 구석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말라서 그런지 전신 타이츠가 잘 어울렸다.
“오래된 집에 사는 요정 같아”라고 준야 씨가 말을 걸었다. 요정이라고 하면 귀엽지만, 애벌레 역할로 학예회에 출연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도대체 왜 부엌 구석 같은 데 않아 있을까?”
“여기가 바람이 통해서 기분 좋아.”
그렇게 말하는 시라토리 씨는 평소와 다른 사람 같았다.
평소에 시라토리씨는 자세가 무척 바르다. 의자에 앉을 때도 언제나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꼿꼿이 등줄기를 세우고 있다. 복장도 청결하기 그지없고, 목덜미가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것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기묘한 하얀 쫄쫄이를 입고 등을 구부린 자세로 앉아 있었다. 진귀한 장면이었다. 352
조지나 클리게 <눈이 보이지 않는 내가 분노와 사랑을 담아 헬렌 켈러에게 보내는 일방적인 편지> 읽어보기
“분명히 의도했던 건 아닌데, 전에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나는 여기에 확실히 있다는 걸 어필했어. ‘전명이지만 똑같이 생활하고 있어.’ 하는 느낌이었지. 하지만 최근에는 ‘전맹이 불을 켜지 않는 게 당연하잖아, 그래도 상관없잖아,’라고 생각이 바뀌었어. 뭔가 그런 부분에서도 마음이 단단해졌구나 싶어.” 387
그처럼 시라토리 씨도 언젠가부터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괜찮게 된 것일까. 그건 순수하게 축하할 만한 일이다. 그래도 계속 상상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여기에 있다’고 전하고 싶어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388
“겐은 ‘어? 숨어버리는 게 뭐야? 알지만, 모르겠어.’ 라고 했어요. 겐이 말한 ‘알지만, 모르겠어.’라는 상태는 사람이 어릴 때 경험하는 모든 일에 해당하는 거예요. 왜 하늘은 파래? 왜 소금은 짜? 그런 거지. 겐은 ‘그 불가사의함을 모른 채 나는 여기 있는 거네.’라고 했어요. 396
그런데 그렇게 밖에 나간 사이에 겐은 만취해서 곤드라져요! 나는 ‘참, 바보다.’ 하지. 그래도 나는 그런 겐이 사랑스러워, 뭐라고 하면 좋을까. 인간인 거지. 그 엉망진창인 인간이 나는 너무 부러워!” 398
안대를 쓰면 일단 시각장애인처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연수가 끝나고 안대를 벗으면 다들 이렇게 말해, 와, 보인다, 보여. 보이는 건 역시 대단해! 그러는 사람들을 보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무슨 게임이라도 하면서 논 거냐고.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알기 위해 안대를 쓰는 건 정말이지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사각장애인의 마음이 되어본다는시점에서 이미 틀려먹은 거야. 그 틀려먹은 생각이 세계를 뒤덮고 있어요. 406
우리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어, 심신이 피폐해져서 방 안에 틀어박힌 우울증 환자로도, ADHD인 사람으로도 될 수 없어. 시각장애인도 될 수 없고, 그 외에 누구도 우리는 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마음 따위 되어볼 수 없다고요! 될 수 없는데, 되자고 생각하는 천박한 생각만이 얄팍하게 폼을 잡는 그런 사회인 거예요. 지금의 사회는. 그래서 불쾌해! 407
그렇지만 그 단계에서 다이스케가 “더는 못 해, 10분만 잘게.”라며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자러 갔다. 최근 닷새 동안 작업이 계속 이어졌는데, 다이스케는 거의 잠을 자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잠은 제대로 자던 나는 정말로 10분 만에 일어날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천장에 매달린 전구를 올려다보았다.
피곤했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감각만이 유독 예리했고, 마음속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무언가가 태어나려 했다.
표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 느낌.
과거도 미래도 전혀 상관없이 ‘지금’만이 모든 존재가 된다. 내 속에 있는 작은 생물이 전율하고 꿈틀거리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만들어지려 한다. 아직 보지 못한 무언가의 온기가 내 속에 있는 터무니없는 동굴을 메워준다. 인간은 이렇게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무언가를 표현해온 것이구나. 하지만 이 특별한 순간은 곧 끝나버린다. 오래가지 않는다. 411
전에 한 번 시라토리 씨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시라토리 씨, 그날 왜 필립스 컬렉션 특별전을 고른 거야?”
“으음, 왜 그랬더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내가 미쓰비시 1호 미술관에 가본 적이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렇구나, 이유는 미술관이었구나,
시라토리 씨는 미술관을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417
그래, 시라토리 씨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했잖아. 나는 미술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미술관을 좋아한다고.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