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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의 방

황유나 저. 2022
방room은 정치적인 공간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버지나 울프Virginia Woolf는 여성들이 자유롭기 위해서 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인간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휴식을 취하고 때로 글을 쓰기 위해 독립적인 공간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방은 인간의 보편적 권리 문제이다.
이 책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남자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자가 찾아낸 답은 명쾌하다. 한국 남자 상당수는 룸살롱, 노래방 등 각종 ‘방’에서 여성 접객원이 수행하는 ‘아가씨 노통’을 향유하면서 남자가 되어 간다.
남자들의 유흥이 타인 여성의 감정과 몸에 의존한다고 가정되어 거대한 상품시장이 끝없이 재발명되는 상황에서 유흥은 여성과 남성에게 같은 의미일 수 없다.
남성이 곧 시민이고 인간이기에, 남성이 즐겁다면 곧 ‘보편적인 인간’ 모두가 즐거운 것이라는 사고의 흔적을 ‘유흥’업소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유흥업소는 남성의 흥을 위해 여성이 멸시당하는 공간이지만 여성의 경험은 보편적인 경험이 아니므로 ‘여성멸시업소’가 아니라 ‘(남성)유흥업소’로 불려왔다.
이제는 남성유흥산업 전반에 동일한 질문을 되돌려줄 차례다. 누가, 무엇을 위해 성적 폭력이 ‘즐거움’으로 용인되는 공간을 조성했는가? 정말 책임질 사람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차벌과 여성 상품화를 기반으로 한 산업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변화를 만들어낼 것인가?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가 만든다.
“남자라면” “남자이기 때문에” 같은 식의 설명을 경계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 어떤 행위도 태생적인 속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50
사실, 우리는 구조 다르다. 나와 너는 다르다. 성별을 비롯해 인종, 나이, 지역과 같이 사회에서 분류한 집단으로 묶이는 대가 있더라도 그 집단 안에서 우리 모두는 다른 속성을 안고 살아간다. 성별이 달라서 서로를 이해하기 힘든 게 아니다. 51
온라인 커뮤니티의 여성 혐오와 성차별 사건에 대한 게시 글을 분석한 김수아와 이예슬은 남성 이용자들이 범죄자, ‘일베’, 기성세대 남성과의 구분 짓기를 통해 자신들을 ‘선량한 남성’이라는 위치에 두고 있다고 분석한다. 법이 폭력이라고 판단하지 않는 한, 여성 혐오적, 성 차별적 언행은 ‘선량한 일반 남성;의 상식적인 태도에 불과하다.
여성 비제이들이 시청자 및 회사와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불합리한 현실과 남성 시청자에 의한 폭력적인 요구 사항들이 구체적으로 등장한 최초의 방송이었다. 그런데 방송이 끝난 후, 사람들은 여성 비제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지들이 돈 벌고 싶어서 하는 거잖오”, “네 다음 창X”, “언젠가 다 들통날 텐데 결혼 어떻게 하려나. 그냥 혼자 살고 싶은 애들은 평생 벗방해도 될 듯”이라는 댓글이 2,000개가 넘는 추천을 받았다. 나는 N번방과 벗방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59
거래가 오갔다면 괜찮다. 여성이 ‘동의’했다면 괜찮다. 동의의 과정에 사기와 기망이 있었더라도, 동의를 철회할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더라도, 일정 정도의 대가를 받기로 했다면 폭력은 거래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남성들은 성폭력범이 되는 일은 두려워하지만, 성구매자가 되는 상황은 별로 주저하지 않는다.
이처럼 집단적 성구매 행위를 둘러싼 남성들 간 역동의 미세한 변화는 남성성의 내용이 사회적, 역사적으로 변모하듯이 남자-되기 전략 역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면이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성, 남자-되기는 이렇게 끊임없이 구성되는 상대적 종류의 정체성이다. 그럼에도 집단과 개인을 막론하고 남자-되기의 매개로 타자로서의 여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여전하다.
유흥산업은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제도적인 위치를 선점했고, 여성을 혐오함으로써 남성을 만드는 ‘남자들의 방’은 유흥산업을 모방하며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가고 있다. 유흥 없고는 여성이 남성의 즐거움을 위해 일하고, 남성은 여성을 멸시하고 성적인 객체로 만드는 과정을 집단적인 즐거움으로 재생산하는 여성혐오 산업의 전범이다.
유흥업소에서 접대를 하며 왜 성폭력 피해를 예상하거나 감수해야 할까? 접대와 성매매는 구분되지 않고 유흥업소는 이 둘이 모두 가능한 공간으로 간주된다. 이 연결성이 있기 때문에 유흥업소 접대는 ‘1차’라 불릴 수 있다. 이 연결성이 있기 때문에 유흥업소 접대는 ‘1차’라 불릴 수 있다. 이처럼 수사기관을 포함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1차’와 ‘2차’를 연결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유흥종사자에 대한 성폭력 가해는 성폭력이 아니라 ‘합의한 성관계’로 간주된다. 다만 법이 ‘1차’와 ‘2차’를 분리해, ‘2차(성매매)’가 업는 ‘1차(접대행위)’를 식품을 접객하는 행위 중 일부로 분류할 뿐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공식화된 ‘1차’와 ‘2차’의 연결성을 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오피스텔 성매매는 ‘여자친구 모드’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서비스’를 홍보하는데, ‘여자친구 모든’는 여성이 남성 손님의 ‘여자친구’처럼 ‘애교’를 구사하고 같이 씻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을 지칭한다. 오피스텔 성매매의 ‘여자친구 모드’는 “단순히 섹스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자아상, 사회적 관계를 특별한 방식으로 구성한 세계를 판매하는 것”이다. 75
다양한 공간을 만드는 법을 배우는 사람으로서 이런 식의 공간은 이제 근절되어야 한다. 오직 한 집단만을 위한 폭력적인 방은 사라져야 한다.
어느 업정이든 ‘여자’와 ‘남자’라는 이성애중심적 파트너 관계가 필수적이고 나를 선택한 ‘남자’가 요구하는 ‘여자’를 연기해야 한다. 흔히 말하듯이, 여성이기만 하면 성매매 여성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성은 성매매 여성으로 ‘재탄생’해야만 성매매 산업에서 상품이 될 수 있다.
남성 성구매자들이 “돌봄, 직관, 정서적 친밀함, 연약함 등의 소위 여성적인 것들을 거부하고 부정”함으로써 남성다움을 획득하는 동시에 비남성적인 타자로서의 성매매 여성과의 친밀하고 진심 어린 관계를 욕망하고 그 관계 맺기로부터 “마음의 안식처”를 얻고자 한다고 분석한다.
유흥업소를 방문하는 남성들은 자신의 “마누라”가, “회사”가 들어주지 않는 자신의 이야기를 여성 종사자들이 들어주고 호응하고 위문해주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풀 수 있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논리는 똑같이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왜 남성들만 유흥업소를 방문하는지, 잘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면 왜 심리 상담가를 찾지 않는지, 반박을 안하고 들어주는 사람이 왜 자신을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앨리 러셀 혹실드Arlie Russell Hochschild <감정 노동>
감정노동 개념은 육체노동에 비해 저평가되고 비가시화된 서비스 산업에서의 감정적 표현과 수행을 분석하는 데 유용하다.
나는 감정노동, 친밀성노동, 심미노동 등 여성 종사자가 수행하는, 여성이기에 요구받는 성별화된 노동을 분석하기 위해 유흥업소 여성 종사자가 수행하는 일 전반을 ‘아가씨노동’이라고 정의했다.
업소 관리자들은 여성 종사자가 과일을 잘 못 깎거나 테이블 세팅을 깔끔하게 하지 못할 가능성을 염려하지 않는다. 여성 종사자는 ‘여성’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성의 필요를 채워주는 노동의 내용을 알고, 이를 수행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업소 관리자, 여성 종사자, 남성 손님 3자 모두가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고, 그 결과 여성들이 테이블에서 반복적으로 하는 육체적인 노동은 비가시화된다.
성매매 여성들이 가명을 사용하거나 개인의 성격을 숨기고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로 스스로를 가공해 개인 정보를 보호하고 사회적 낙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전략으로 ‘가공된 정체성maufactured identity’을 구사한다는 지적은 성매매 여성뿐 아니라 동시대 노동자들의 공통적으로 구사하는 신체의 자본화 과정으로 지적된 바 있다.
남성 손님과 여성 종사자의 비대칭적 관계, 유흥업소의 규율에 맞춰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관리, 통제해야만 수익을 낼 수 있는 업소 운영 체계는 여성 종사자가 스스로의 감정으로부터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미러초이스
여성들이 대기하는 공간에 밖에서만 안을 볼 수 있는 거울을 설치해 남성 손님들이 가게의 여성 종사자를 한눈에 보고 선택할 수 있도록 고안한 초이스 방식이다.
이러한 공간 편성은 굉장히 일상적인데, 인간과 사물의 논의에서만 그러하다. 우리는 편의점과 마트 등에서 잘 정돈되어 진열된 물건들을 보고, 선택하고, 구매하기 때문이다. 이 논의가 인간과 인간 수준에서 작동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유흥산업과 관련된 남성 행위자 모두가 여성 종사자를 성적 침범이 이미 합의된 ‘상품’으로 간주한다. 업소 관리자들은 자신들이 여성 종사자들을 보호해준다고 말하지만 여성 종사자는 직간접적으로 이들이 성적 침범의 가해자로 돌변하는 모습을 목도한다. 189
여성이 ‘접대’를 하는 한 국가는 피해를 피해로, 폭력을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유흥업소 관리자, 보도 실장, 남성 손님만이 여성 종사자에 대한 성적 침범과 같은 인권 침해를 상품으로 거래될 수 있다고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도 유흥업소를 공식적인 산업으로 인정하고 이들의 운영 방식을 방치하고 조장함으로써 여성 종사자의 폭력 피해 경험을 무시하고 고립시킨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여성들을 개별 유흥업소에 종속시키지 않고도 유흥산업 전반을 통해 관리할 수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유흥업소는 이제 강제와 폭력의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내가 필요한 시간만큼 일하고 자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다르게 이해된다.
남성 손님에 의해 방에서 쫓겨나는 일은 있어도, 유흥업소에서 여성 종사자를 아예 못 나오게 하지는 않는다. 유흥업소 입장에서는 여성이 많을수록 남성 손님들이 방문하고 돈을 쓰기 때문이다.
이제 유흥업소는 스스로를 ‘자유로운 일터’로 위치시킨다. 술 작업, 남성 손님을 ‘갑’으로 만들기 위한 온갖 노동, 접대 과정에서 강제되는 신체성과 부정적인 감정 처리 등 유흥업소 접대 과정에서 여성 종사자들이 강제적으로 따라야 하는 자유롭지 않는 조건들은 ‘자유로운 일’이라는 수사에 감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