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책을 읽으며 다정한 어른이 되는 법
김유진 저, 민음사
아동문학은 굉장히 독특한 텍스트입니다. 아동문학은 어린이 독자를 1차 독자로 하면서도 어른 독자를 2차 독자로 고려해 창작됩니다. 8
그런데 만약 아동문학에서 만나는 어린이가 늘 같다면 그건 가짜 어린이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어린이는 저마다 다르고 계속 변화하는데 그저 하나의 모습으로만 그려낸 것이죠. 어른이 지어낸 보편적 어린이 상이 오늘날 살아 숨쉬는 어린이에게 덧씌워진 것은 아닌지 의문해야 합니다. 작품 속에서 만나길 기대하는 어린이가 혹시 자신이 원하는 특정 모습은 아닌지 습관처럼 돌아봐야 합니다. 어린이를 대상화하지 않고 주체로서 재현할 때,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이 가능할 테니까요. 10
→ 무언가를 진지하게 할 때는 끊임없이 자신이 쉽고 편한, 익숙한 길을 택하는 걸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도 중요하게 다가온다.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
늑대가 사는 숲으로 나가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지, 사냥꾼이 되어 숲을 지킬지.
어린이의 공간을 만드는 건 어른이다. 어른이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어린이를 돌보고 지키는 공간이 넓어지는 만큼 어린이의 공간이 넓어진다. 그 공간이 세심해지는 만큼 어린이는 안전해진다. 안전한 모험은 없지만, 어린이의 공간이 안전할 수록 모험의 기회가 늘어난다. 좁디좁은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안전한 출발선에 설 수 있을 때 어린이는 자란다. 어린이의 긍지에 기회를 주자. 66
<단어의 여왕>
글은 일용할 양식이 되지는 못하지만 분명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세계를 조금씩 혹은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창작 작업으로 이를 경험한 작가들은 어린이가 글을 쓰는 이야기들로 어린이의 삶을 변화시키는 언어의 힘을 말하고 있다. 70
<사랑의 학교>
여전히 학교가 교육 기회의 전부인 어린이도 있다는 사살을 코로나 대유행은 재차 확인시켰다. 학교에서 먹는 밥이 유일하게 따뜻한 끼니이고,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은 학대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학교가 자신을 가장 환대하는 공간인 어린이도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105
→ 세상의 수 많은 어린이가 자라서 다음 어린이에게 수백, 수천 가지의 ‘나’를 선물한다.
떠드는 아이들 시리즈 1권, <어쩌다 부회장>
어른들의 선거 유세에서도 어퍼컷과 발차기 퍼포먼스가 등장하는 걸 보면 아빈이는 남다른 정치 감각을 타고난 어린이임이 분명하다. 109
<오늘부터 배프! 베프!>
서진이의 급식 카드를 따라가다 보면 복지란 그저 밥을 굶지 않게 해 주는 걸 끝으로 삼지 말고 남들과 달리 제한당한 자유와 권리를 확장시키는 걸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에게도 급식 카드를 원하는 대로 쓰고 싶은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관계가 있다. 급식 카드를 쓰며 움츠리지 않도록 마련돼야 하는 존엄이 있다. 이 동화는 급식 카드를 내보이며 우리 사회가 어린이의 밥을 얼마만큼 정성스럽고 세심하게 차리는 지 묻는다. 124
풍성함을 세상 모두와 나누던 그림책의 밥상이 바로 그들의 밥상이 되길 바란다. 125
<사랑이 훅!>
‘작가의 말’에서 “결국 나는 사랑을 통해 성장했습니다”라고 밝히듯… 143
아동문학은 어린이 독자가 읽으라고 쓴 책만은 아니다. 어린이의 이야기를 어른이 대신해 꺼내 놓은 책이다. 좋은 아동문학에는 비록 어른이 대신했어도 어린이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무엇에나, 어디에서나, 늘 그러했다. 190
SF 등 장르 형식으로 학교 폭력을 말하는 다른 청소년 소설들 역시 폭력을 생생하게 드러내고는 있지만 현실의 폭력을 내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현실을 우회하며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197
<롱 웨이 다운> 제이슨 레이놀즈
유형이 달라졌을 뿐 밤이 오면 내 주위를 배회하는 불안의 부피는 여전한지도. 234
<밤을 켜는 아이> 레이 브래드버리
스위치를 다시 하나씩 꺼 보자 제안하고 그것이 밤을 켜는 일이라고 말한다. 스위치를 내려 밤을 켜면 귀뚜라미 소리, 개구리 소리, 별과 달이 켜진다고 알려 준다. 어두운 밤이라야 비로소 들리는 소리와 보이는 빛이 있다는 사실을 환상적인 목소리로 전한다. 237
<소설처럼> 다니엘 페나크
다니엘 파나크는 ‘독서 지도를 한다면서 청소년들에게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던’ 모든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에 관한 그 권리들의 목록은 이러하다. 책을 읽지 않을 권리,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다시 읽을 권리, 아무 책이나 읽을 권리, 아무 데서나 읽을 권리,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 소리 내서 읽을 권리, 읽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 246
그냥 재미있는 책을 쓰면 되지 굳이 책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책으로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248
→ ㅋㅋㅋ
지금은 모든 어린이가 문자를 읽을 수 있지만 문자를 제대로 혹은 고도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의 여부는 과거 지식 교육 시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교육의 평등 문제와 직결된다. 문해력 교육을 포함해 체계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서 소외된 채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준의 영상 콘텐츠에 빠져드는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책이 놀이이자 위안의 방편이 될 수 있을까. 251
다음 세대를 향하는 아동문학은 어쩌면 더욱 치열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고민하고 있다. 255
작가는 아동문학이라고 해서 아름다운 현실만 보여 주는 일은 거짓되고 불합리한 태도라고 여긴다. 어린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아름답지 않은 현실에서 살아가며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린이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은 아동문학 작품의 근본 지형을 바꾸어 놓는다. 261
짧은 문장으로 서사를 이러 가는 게 사실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짧은 문장일수록 문장의 안팎이 마치 시처럼 섬세하고 풍부한 의미를 부르도록 고려되어야 한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문장에서,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의미가 발생하며 서사를 밀고 가도록 치밀하게 조정된다. 269
모든 어린이는 다 다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어린이가 각자 하나의 정체성을 갖는 것도 아니다. 한 어린이에게도 다양한 특성과 마음이 있다. 하지만 대개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보편의 어린이’를 찾으려 한다. 어린이들에게서 각자 다른 점을 보려 하기보다는 어른을 기준으로 해서 어른과 대비되는 어린이들만의 공통된 특성을 찾고 기뻐한다. 어린이가 어른과 다른 점은 분명 있고, 그 점들 상당수는 어른이 본받을 만큼 반짝이며, 그 점이 어린이를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다. 273
모든 어린이는 다르다. 저마다 다른 어린이들이 모여 ‘어린이다움’을 만든다. 한 명의 어린이를 바라보기보다 ‘어린이다움’을 먼저 찾으려 하고 그걸 두고 손뼉 치면서 혹시 세상에 찌든 어른 자신의 마음을 위무하고 싶은 건 아닌지 되돌아보자, 그럴 때 어린이는 어른의 자기 반성으로 세워진 주체가 아닌 당당하고 자유롭게 존재하는 진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74
어린이 존재를 늘 새로운 시선으로 발견하고 싶은 나의 바람이 언젠가터 장애학에 닿은 건 그런 이유다. 279
→ 반가움 마음에 밑줄을 나와는 반대로 어린이에서 장애인을 만났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마음이 붕 뜬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장애인이이나 어린이를 비롯한 소수자를 오직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 균질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시선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소수자를 대상화하며 균질한 ‘집단’으로만 파악하는 시선은 고정관념에서 비롯되며,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소수자를 개별 존재로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장애인’, ‘어린이’이라는 관념의 테두리에 가둔다.
어린이를 작고 귀여운 정물처럼 보고 싶어 하다가 노키즈존 밖으로 쫓아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어린이와 장애인의 소수자성은 생각할 수록 너무나 닮아 있다. 가끔씩은 몹시 슬퍼질 만큼. 281
→ 책을 읽는데 <생태시민을 위한 동물지리와 환경이야기>의 이 문장이 번뜩 생각이 났다. 또 동시에 어딘가에서 읽었던 어린이 놀이터에 관한 이야기도 생각났다. 어린이에게 놀이터 혹은 놀이 공간을 만들어주는 이유는 그곳에서만 뛰고, 소리치고, 움직이라는 의미가 담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작가의 말처럼 가끔씩은 이런 사회가 몹시 슬펴진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해함’이 점점 중요해지고 더구나 소수자가 끼치는 불편이 민폐로 취급되는 사회 분위기에서 장애인은 무해함을 강요받는다. ‘무해함’에 대한 우리이 강박은 우영우를 귀여운 캐릭터로 만들었다.
귀여움은 무해해 보인다. 제어가 가능한 타자, 자신을 침범하지 않는 타자로 여기게 만든다. 286
그래서 나는 아동문학 작품이 어린이를 귀엽게만 그릴 때 잠시 멈춰 귀여움의 근원이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따지고 의심해 본다. 물론 어린이는 귀엽지만, 귀여워야 어린이인 건 아니다. 287
아동문학은 어린이의 소수자성에 바탕하고 이를 궁리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311
(143쪽까지 책을 읽고 난 뒤의) 첫번째 후기
최근에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생겨 <다큐의 기술>이란 책을 읽기 시작했다. 평소에 존경하던 이길보라 감독님의 책,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 덕이었다. 사회를 새롭게 이해하고, 포착한 결과들을 촘촘하게 설계하여 울림을 주는 수작들이 책에 실리다보니 자연스레 공간의 주체를 깊고 생생하게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내가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이에 관한 책들은 왜 이토록 나를 즐겁게 흔드는지, 아동문학에 관한 이 책을 읽다 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어린이와의 인연들이 기다려졌고, 또 그 순간을 자꾸만 상상하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었다. 동화, 아동문학, 너도 다큐멘터리처럼 매력있구나. 즐겁게 길을 헤매고 있다. 나의 언어를 찾아 헤메는 길은, 그 과정조차 행복하다.
두번째 후기.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도 그러하고 최근에 좋은 작품들을 여럿 소개하는 책을 만나 반갑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있는데도, 세계 각국의 다양한 저자와 그림책 작가들, 출판사들을 만나다니 독자로서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있을까. 반가운 마음한편에는 또 부러움이 자리잡기도 한다. 나중에 내가 책을 쓰게 된다면 이만큼 따뜻하고 예리한 작품들을 이만큼 소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본다.